도입 이후 한 달, 도로명주소에 대한 생각..
도로명주소 전면시행이 된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과연 이 도로명주소 체계가 합리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어왔습니다.
1. 도로명 체계 도입 배경과 근거
정부에서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선진국이 대부분 사용하고 있는 체계라며 도입 배경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새로운 체계를 도입한다면 사용자들에게 이해를 시켜주는 것이 우선인데 너무 조급하게 시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2. 국제화 트렌드에 앞장선 외래어 사용
급하게 시행했다는 기분은 다른 부분에서도 느껴졌습니다. 도로명에 대한 부분인데 무분별한 작명에서 상당수 외래어가 사용된 점인데 오랫동안 사용해왔고 그 지역을 대표하던 지명이 사라지고 외래어 도로명이 생김으로써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디지털로”, “사파이어로”, “로봇랜드로”, “비즈니스로” 등등 이외에도 “엘씨디로”, “모듈산업화로”, “APC로”와 같이 영문약자 또는 영문표기, 영문+한글을 합친 알 수 없는 명칭도 생겨버렸고 심지어 특정 기업명을 도로명으로 사용한 부분도 있습니다. 국제화를 이유로 이런 외래어 도로명이 무분별하게 지정되었고 한글과 문화의 훼손에 앞장선 꼴이 된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3. 도로명주소는 국제 표준?
도로명주소는 국제 표준을 따른 합리적인 주소 체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소 체계에 표준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합니다. 미국식 주소체계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지역설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은 계획적인 도시설계로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짓지만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땅의 구획을 먼저 지정하고 건물을 지은 뒤 도로가 깔려왔습니다. (일부 계획도시는 제외) 때문에 길이 잔 나무 가지처럼 복잡한 구조가 만들어졌고 수없이 많은 골목길에도 하나하나 도로명이 생겨납니다. 그 양은 아주 방대한 수준이죠. 이미 우리나라의 지역설계 자체가 도로명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번주소를 계속 유지한다는 주장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입니다.
4. OO동(리)이 사라진 도로명주소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동(리)단위가 도로명주소에서는 사라졌습니다. 이게 불편을 겪게 되는 핵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동명칭은 우리도 모르게 긴밀하고 깊숙이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던 지역 구별단위였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지하철역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문래역, 이촌역, 압구정역, 청담역, 신당역, 방배역, 사당역, 합정역 등등 동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역이름이 상당히 많습니다. 덕분에 대략적인 지역을 인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명들은 오랫동안의 시간과 지역 특색에 따라 내려오던 역사와도 같은 의미를 둘 수 있는데 이것이 사라진다면 도로명주소 도입 여부와 별개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이런 측면이 있는가 하면 주소를 다루는 일을 하는 분들에게는 불편함은 배로 다가옵니다. 동단위가 없어지게 되자 최소 구역단위는 자연스럽게 시, 군, 구가 됩니다. 서울의 경우 이로 인해 구 하나에 많게는 1000여개의 길을 다루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의 도로명이 2개 이상의 구에 중복되어 존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단순 명칭 중복인 경우도 있겠지만 하나의 길이 여러 구를 지나갈 때 흔히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이로인해 직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은 상태입니다.
5. 도로명주소 도입이 문제가 아니다.
도로명주소 도입 자체는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였다시피 도로명의 외래어 사용, 동단위 지명 삭제의 이슈는 지켜보고만 있자니 너무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마도 현재 도로명 주소에 동단위만 표기가 되어도 현재에 느끼는 불편의 대다수는 해결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 동단위 지명이 사라졌을까?” 의문에 조사를 해봤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국제적으로 동 지명을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동 지명이 일제시대의 잔재였기에 이를 제거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제 잔재를 없애겠다는 취지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국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고유지명이 없애겠다는 발상은 공감하는데 무리가 있었습니다. 국제 표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쉽고 좀더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주소체계에 초점을 두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6.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겠지
도로명주소를 환영하는 분들의 대부분 생각은 “초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 또는 “시간이 지나고 후세에는 보편화 될 것이다”로 수긍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적응의 문제가 아닌 정말 합리적인가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도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적응을 하고 불편함을 잊게 됩니다. 그 전에 문제가 있다면 수수방관하지 않고 고쳐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도로명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가 익숙해지면 하나는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잊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신림동, 역삼동, 대치동, 청담동, 마장동, 혜화동 과 같은 지명들입니다. 익숙해질 때 즈음이면 이미 지도의 판이 180도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OO동으로 불리는 대신 OO길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했던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까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