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멸, 모두가 이유를 알고 있지만 잊고 있었다.
휴일에는 한 켠에 TV 모니터와 노트북을 열어두고 내가 주로 하는 일(개발 혹은 관련된)을 하곤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짧은 다큐를 보면서 미처 내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짧은 문장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한다. 우리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야하고 청년들이 고향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만들어 줘야한다.
지방소멸을 주제로 짧은 다큐에서 어떤 한 연구원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인데 물론 저 문장에서 찾을 수 있는 솔루션은 없다. 다만 나는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나역시 남 일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떠오르게 했다.
직업소개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할 줄 아는 건 동네에서 컴퓨터 좀 만져본 것 뿐이었다. 우물안에 개구리도 아니고 올챙이던 그때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간판에 “직업소개소”라는 문구를 보고는 어설픈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 곳 사장님은 이력서를 쭉 보시더니 대뜸 건네는 한마디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여긴 왜 왔어요? 컨베이어 벨트 작업은 해봤고?”
당시 사장님은 이런 이력서는 처음보기도 봤겠거니와 당황하셨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때 그 어색한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백사장에서 모래알 찾기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이력서를 여기저기 돌려가며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해졌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는데 아무리 내가 하고자하는 일을 찾는 회사가 동네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나는 이 동네 밖으로 출퇴근 할 것이라는 생각을 1도 하지않았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기에 이사와서 유년기를 보낸 동네에서 떠난 다는 것은 특별한 문제나 결핍의 사유가 없다면 일반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대중의 인식과 이미지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이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만큼 편하고 안락한 곳도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여기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타지에서 직장을 구했다.
학교 졸업이 다가올 즈음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에 조예가 깊은 교수님께서 같이 일해 볼 것을 권유하셨고 결국 그렇게 서울에서 첫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일에 있어서는 정말 만족스러웠고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을 것이라는 부분도 당시엔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당시 통근에 걸리는 시간은 2시간이었다. 편도 기준 2시간이다. 왕복 4시간.. 오전 9시 출근을 위해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마을버스 -> 지하철 -> 도보 -> 사무실 여정을 매일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회사 인근으로 거처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집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 내내 출퇴근이 힘들지 않았다. 집에 가면 항상 대화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속에서의 반복되는 경험은 곧 적응의 시작
서울에서 일을 한지 3년.. 이직 후 두번째 회사에서의 생활 중이었다. 계속 집과 회사를 드나들면서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집이 아닌 부모님집이라는 머릿속 개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직한 회사는 구로의 21층 높이 테라스가 있는 곳이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마다 그 테라스에서 바깥 시야의 많은 집을 보며 매번 생각하기를..
“이 많은 집들 중에 내 집이 없네.”
당시 2010년이었고 그 당시에도 서울의 집마련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너무 복잡하고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이 곳에서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어릴적 보내왔던 곳처럼 한산하고 녹지가 많고 공원 벤치에서 누워 쉴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다. 내가 테라스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서울은 그런 곳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부동산 개념 조차 없을때 고심 끝에 내가 살고 싶었던 곳은 경기도 과천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던 터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1천만명의 사람들과 섞여 살기 시작
결심 없이 물흐르듯 독립과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10년을 넘게 살아오다보니 초년생때 복잡하고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이 곳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적응이 된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곳은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향과 서울 두 곳 뿐이고 그 외 다른 곳은 내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야상의 타지다. 만약 내가 서울을 떠난다면 선택지는 여럿 있겠지만 나의 고향, 배우자의 고향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인구 100만이 안되는 동네에서 인구 천만에 가까운 10배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동네로 터를 잡았지만 역설적으로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이웃과 친구들은 1/10도 못미친다.
그래서 결론
여기까지는 내 이야기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도시로 이동하는 이유는 회사였고 그 다음은 이동 거리(시간)였다. 가까운 곳에 일 할 수 있는 회사가 없었고 그래서 먼 타지로 일을 다녔다. 하지만 그것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 도시에서의 생활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적응하게되고 그렇게 흡수되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러나 돌아간들 내 추억 속 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도시의 생활 인프라는 족쇄처럼 우리를 쉽게 놔주지 않는다.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은 경기도 안산시. 제목과는 좀 괴리가 있다. 하지만 지방소멸이라는 단어가 비단 지방에만 해당될까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큐에서는 수도권에서 아주 멀찍하게 떨어진 남해바다 앞 마을까지 가서 취재를 했지만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서울은 토박이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외지에서 왔다. 때문에 수도권으로 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경험 당사자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누구보다 더 잘알지만 ‘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 내가 주로 하는 일에만 몰두 있었고 그 동안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뭔가 일이 막히고 답답하면 바깥 바람을 쐬고 오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만큼 내가 한 곳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잠시 환기를 시켜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다시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주제로 내 생각을 써내려가니 환기의 의미를 가지게되어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옛날 어릴때 생각도 나고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