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KB] 해피해킹 스튜디오 사용기
세번째 해피해킹
해피해킹 키보드를 처음 만져보기 시작한 건 2016년이었던 것으로 이 블로그에 기록이 남아있었다. 시작은 이 포스팅 글에서 출발한 듯 싶다. 2015년 언저리부터 OS계의 서브컬처를 찾기 시작했고 우분투를 데스크탑에 설치해 사용하면서 색다른 GUI UX를 경험하고 싶었지만 결론은 VI 에디터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키보드의 Caps Lock 키를 Ctrl로 키맵을 바꿔 사용하다가 급기야 해피해킹 프로페셔널2를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피해킹 하이브리드 Type-S를 추가로 들였고 이번 해피해킹 스튜디오로 3번째 해피해킹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피해킹 프로페셔널2는 이전 직장 동료에게 입양보냈고 지금은 집에서는 하이브리드 Type-S, 회사에서는 스튜디오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한 세기를 건너온 디자인
해피해킹 키보드는 처음에 들였던 이유 중 반절 이상은 레거시한 디자인이었다. 블랙 색상도 존재했지만 난 화이트 모델을 고수했다. 이유는 CRT 모니터에나 어울릴듯한, 20세기에서 풍파를 견딘듯한 옛날의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때 “인체공학 디자인”이 유행하면서 키보드, 마우스가 곡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뭘 써야할지 굉장히 난감했다. 그런 시기를 보내서인지 클래식함을 더 갈구하게 된 것 같다. 해피해킹의 화이트 모델 디자인은 키보드의 클래식함 그 자체였고 키보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얼핏 봤을때 모습은 삼성전기 키보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가격을 알려주면 놀란다..)
이번 출시한 해피해킹 스튜디오는 그런 20세기에서 21세기 디자인으로 완전히 탈피했다. 개인적으로는 아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변화의 의지를 그만큼 어필하는 의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애플처럼 “Designed in california in collaboration with huge”라는 문구로 디자인을 강조했다. 디자인 덕에 지금 구형이 된 해피해킹 하이브리드는 팔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디자인의 특징을 몇가지 꼽자면 키보드에 팜레스트처럼 공간이 생겼다. 이는 마우스를 대체하는 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존 건전지통(?)이 하우징 안으로 들어가서 기존처럼 튀어나온 형상을 없애버렸다. 이 부분은 잘 처리한 것 같다. 다만 필요한 건전지 슬롯이 2개에서 4개로 늘어나버렸다.
키보드에 마우스를 품어버렸다.
가장 파격적인 추가 기능은 키보드에 마우스를 품어버린 것이다. 어릴적 씽크패드에서 봐오던 빨콩이 해피해킹 키보드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그리고 스페이스바 하단에 마우스 좌우 버튼과 Fn2 기능으로 3개의 버튼이 추가되었다. 마우스 키는 이미지로 봤을때 뭔가 딸깍딸깍할 것 같은 느낌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써보면 키압이 상대적으로 높은 작은 스페이스바의 느낌으로 눌렸다. (엄지 손가락으로 튕기는 맛이 있다.)
키보드 가운데 자리잡은 빨콩은 며칠써보니 장단점이 극명했다. 키보드 밖으로 손이 나가는 것을 극단적으로 막아주는 역할은 제법하지만 모니터를 여러대 물려 사용하는 작업 환경에서는 빨콩의 마우스 포인터 이동 속도의 한계로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정밀한 커서 포인팅에도 애를 먹는 순간이 잠깐씩 생겨났다. 그렇다고 아주 못쓸 정도는 아니었고 나름 용도를 구분해서 사용 중이다. IDE나 에디터 하나만 집중해서 작업할때는 빨콩을 사용하고 그 외에 브라우징이나 GUI 프로그램을 여러개 띄워 사용할때 즉 개발 외적인 업무를 할때는 가감없이 트랙패드를 사용한다. 확실히 집중해서 개발할때 마우스나 트랙패드로 손을 옮겨가는 것이 귀찮았고 이런 귀찮음을 해소해주는 역할로는 충분했다.
빨콩이 너무 좋은 위치(G, H, B)에 알박기를 한 탓일까 주변 키를 누를때 빨콩의 간섭이 조금은 성가시게 한다.
제스쳐.. 안스치고 싶은 제스쳐..
이건 좀.. 좋은 얘기가 생각나지 않는다. 해피해킹 스튜디오 홍보 영상에서는 최첨단의 제스쳐 기능! 으로 표현을 했지만 스크롤을 위해서 키보드 밖으로 손이 나가는 것이 꽤나 귀찮았고 그럴 바에는 좀 더 노력해서 트랙패드나 마우스를 잡는게 속편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직 제스쳐 기능의 감도나 응답성이 매끄럽지가 못했다. 아무리 문질러도 스크롤이 안될때도 있고 키보드 테두리를 문질러대는 모습을 옆 동료가 보면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램프의 지니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인가.. 아직은 아쉬운 제스쳐 기능이다. 펌웨어로 감도 개선을 해주면 좀 더 써볼 생각은 있지만 지금은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스크롤을 할 땐 빨콩 + 키보드 마우스 가운데(Fn2)키를 눌러서 사용하는 편이 편했다.
무접점 러버돔이 아닌 기계식 리니어 스위치로..
처음에는 무접점을 버리고 기계식 리니어 스위치로 바뀐 것이 의아했다. 이 변화는 디자인보다 더 충격적인 시도였고 해피해킹만의 큰 비중을 하는 시그니처 요소 하나가 제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타이핑을 해본 결과는 놀라웠다. 그 고유의 초콜릿 부러뜨리는 느낌을 기계식 스위치로 구현해냈다.. 기존에 쓰던 하이브리드 Type-S보다 키압이 낮은 느낌이었고 결론적으로 스튜디오의 타건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제 다양한 스위치들의 탄생 그리고 핫스왑 기능의 대세를 따르는 듯 했다. 이 행보는 한길만 걷는다는 보수적인 일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과감한 시도는 한편으로 박수쳐주고 싶다. 하지만 가격은 치던 박수를 멈추게 만들게 한다.
모든게 다 바뀌어도 배열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참 다행이다. 내가 생각하는 해피해킹의 핵심 가치는 키배열 40%, 무접점 30%, 디자인 30% 였다. 키배열을 빼고는 모두 새로운 시작인데 뭔가 키에도 이상한 걸 넣지 않았을까 걱정이 있었지만 키배열만큼은 기존 방식을 고수했다. 키배열마저도 바뀌었다면 난 더 이상 해피해킹을 데려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진입 장벽으로 느껴지는 이 키배열은 한번 손에 익기 시작하면 손이 기억하고 몸이 기억한다. 주변 이야기나 관련 유튜브 컨텐츠를 보면 해피해킹을 쓰는 사람이 안써본 사람들에게 이런 부분이 좋다라고 설득하지만 결과적으로 써보지 않은 사람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사용자 경험(UX)이라는게 말로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을 이 키보드를 통해 다시 한번 입증하는 셈이다. 이 아름다운 키배열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해피해킹이 아니더라도 다른 브랜드에서도 시도를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아마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결론: 진입장벽이 높은 키보드에 더 높은 장벽을 세워버렸다.
해피해킹 키보드는 내가 처음 접했을때에 비해 현재는 더욱 대중에 알려진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쓰는 것을 고려하는데까지는 바로 위에 언급한 키 배열이 발목을 잡는다. 이 키배열과 사악한 가격이 넘기 어려운 벽을 형성해 버렸는데 스튜디오가 출시하고 이 장벽은 더 견고하고 높아졌다. 빨콩과 제스쳐가 추가되었고 가격은 더 사악해졌다.
이 키보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식밖의 총알이 필요하고 지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하며 익숙하지 않은 UX를 겸허히 받아들여야하는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해피해킹과 내가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참고로 회사를 이직하고 온보딩하고 적응하는데 보통 1개월, 새로운 개발 프레임워크 또는 언어를 숙지하는데 2개월정도 걸리는 것에 반해 해피해킹은 적응하는데 3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